“충의로운 넋이 낫지 않겠는가?”…면암 최익현 항일의병 정읍과 순창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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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로운 넋이 낫지 않겠는가?”…면암 최익현 항일의병 정읍과 순창을 찾아
  • 포천일보
  • 승인 2022.07.2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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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면암숭모사업회 주관, ‘면암 義를 찾아가는 길’ 역사기행
74세 노구 의병봉기 대마도 순국아사 애국충정은 어디로 갔나
순창의 한 초등학교 담벼락 한 뒤퉁이에 초라한 행색으로 남아

“어느 시대엔들 난적(亂賊)의 변고가 없겠는가만,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을 것인가? 또한 어느 나라엔들 오랑캐의 재앙이 없겠는가만,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의병을 일으키라.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로운 넋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적과 싸우라.”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이 정읍 무성서원에서 왜적 일제에 맞서 항일전쟁을 선포하며 전국 각지에 보낸 격문 내용이다. 지금 읽어도 마음에 뭔가 용솟음 치는 게 느껴진다.

면암숭모사업회는 지난 23일 역사탐방 일환으로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활동을 시작했던 전북 정읍 무성서원과 의병전투 중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체포된 역사의 현장, 순창 객사터를 다녀왔다.
면암숭모사업회는 지난 23일 역사탐방 일환으로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활동을 시작했던 전북 정읍 무성서원과 의병전투 중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체포된 역사의 현장, 순창 객사터를 다녀왔다.

 

포천면암숭모사업회가 주관한 ‘면암 義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역사탐방에 동행했다. 23일 탐방에는 이른 새벽 면암숭모사업회 회원 30여명이 버스에 탔다. 백영현 포천시장이 나와 품격있는 인문도시를 만들겠다고 한다. 포천시가 면암 사업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탐방에 함께 하자고 했을 땐 사실 선뜻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근현대사 갈림길에서 자신을 불태웠던 선생의 정신이 깃든, 의병활동 지역을 찾아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섰다. 필자가 선생이 잠든 예산과 선생의 사당 청양 모덕사를, 다음에는 순국아사 하신 일본 대마도를, 도끼상소 후 유배지 제주도 면암길을 다녀왔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를 타고 전북 정읍 무성서원에 이르는 동안 일행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다. 꽤 지루한 시간이다. 꺼져가는 조선 운명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포천을 출발, 정읍에 도착하는 동안 선생께서는 어떤 상념에 잠겼을까? 생각하니, 뭔가 뭉클함이 다가온다.

면암 선생의 항일 정신을 기려 세웠다는 병오창의기적비를 선생의 후손 최진욱씨가 돌아보고 있다.
면암 선생의 항일 정신을 기려 세웠다는 병오창의기적비를 선생의 후손 최진욱씨가 돌아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성서원에 도착하니, 정읍 문화해설사가 최치원 선생이 신라시대 태산현(현재의 정읍) 수령 재임 시기 공적을 크게 여겨 생사당(살아 있을 때 받들어 모시는 사당)으로 시작되었다는 것부터 이곳에서 배향하는 인물까지 모든 유래를 알려준다.

면암 선생에 흔적에 대해선 그리 많은 시간을 배정하지 않았다. 면암이 의병을 모으고 격문을 전국에 보냈다는 이야기 그리고 선생의 뜻을 기려 세웠다는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 등에 대한 설명이 전부다. 면암의 흔적을 찾아 이곳에 온 일행으로서는 뭔가 부족함이 느껴진다.

면암의 항일 의병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순창 객사에서 순창군 문화해설사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박제순 해설사는 친절하게 면암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모으고 순창 항일전투, 그리고 체포되기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면암이 항일운동 지역으로 전라도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최치원 선생의 정신을 높이 기리는 전라도 유생과 백성이 많았기 때문일 거라고 추정해 본다.

면암은 무성서원에서 유생들과 뜻을 모으고 일제와 싸울 것을 종용하는 창의격문을 전남 순천과 여수, 광양, 장흥, 해남 등지에 보냈다. 임병찬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병기를 수집하고 뜻을 함께 했다. 이때 면암의 나이 74세의 노령이었다.

박제순 순창군 문화해설사가 면암 선생이 정읍에서 의병을 모으고 순창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박제순 순창군 문화해설사와 공무원이 나와 면암 선생이 정읍에서 의병을 모으고 순창에 이르는 모든 과정 그리고 순창군에 남아있는 유적지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태인에서 면암은 유생과 창의토적소라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의병활동을 행동으로 옮긴다. 전남지역 선비를 만나고 애국지사에게 창의를 호소하는 한편 동지들과 동맥록을 작성해 갔다. 정읍을 출발할 때의 의병은 100명에 이른다. 을사늑약 후 호남지역에서의 최초 의병이다. 담양과 곡성 등지를 순회하자 의병세가 커진다. 의병봉기 10여일만에 800여명으로 늘었고, 이들은 군사훈련과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순창에 이르렀을 때는 1천여명으로 늘었다. 군량과 병기도 어느 정도 갖추었다.

면암의 의병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조선 정부를 앞세워 해산할 것을 종용했다. 일제가 포위망을 형성해 온다는 정찰보고도 들어왔다. 선생은 즉각 맞서 싸우고자 했으나, 막상 대적할 상대는 일본군이 아니라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로 구성된 조선의 관군이었다.

선생은 동족끼리 싸우는 것만은 차마 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관군에게 물러날 것을 종용했지만 거부당한 상황에서 결국 의병해산을 명령이 내려진다. 해산명령에도 100여명이 남아 있는데, 공격을 받았다. 빗발치는 탄환에 숨져가던 한 의병이 면암 선생에게 “아직 왜놈 한 명도 죽이지 못한 채 죽게 되니 눈을 감을 수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관군과 일제의 공격에 많은 의병이 전사하고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유종규, 조우식, 조영희, 라기덕, 이용길, 이해용, 최제학 등 12명만 살았다. 세상은 이들을 ‘순창의 12의사’라고 부른다.

체포된 면암과 12명의 의병은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끌려가 고종과 관련한 집요한 추궁, 고문을 받았다. 아무것도 입증되지 않자 일제는 면암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에게 군율위반죄를 적용, 일본 군함에 태워 대마도 일본군 위수령으로 압송했다. 대마도에 도착한 일제의 물과 음식을 거부한 채, 그해 12월 30일 순국아사하니 선생의 나이 74세였다.

순창초등학교 담벼락 한 뒤퉁이에 초라함으로 남아, 면암 선생과 12명의 의병의 항일정신을 알려주는 순창의병항일의적비
순창초등학교 담벼락 한 귀퉁이에 초라함으로 남아, 면암 선생과 12명의 의병의 항일정신을 알려주는 순창의병항일의적비

 

과거 순창 객사터에 자리잡은 순창초등학교 조그만 담벼락 한 귀퉁이에 면암 선생 의병을 기념하는 ‘순창의병항일의적비’가 초라한 행색으로 서 있다. 현대식 초등학교와 바로 옆 순창군청의 거대함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일제에 짓밟혀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되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면암 최익현 선생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먹고 살기에 바쁜 이 시대의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 싶다.

“역사를 읿어버린 민족은 희망이 없다”는 문구가 떠오르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이런저런 상념으로 일행은 출발지 포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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