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봉 서성의 문집 약봉유고(藥峰遺稿)에서 이순신과 한산도 관련 시를 발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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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 서성의 문집 약봉유고(藥峰遺稿)에서 이순신과 한산도 관련 시를 발굴하다
  • 포천일보
  • 승인 2022.08.0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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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로 영남 이순신연구소(경북 예천)
박갑로 영남 이순신연구소(경북 예천)

임진왜란 당시에 경상우도감사(慶尙右道監司)로서 亂中日記에 30여회나 등장하는 약봉(藥峰) 서성(徐渻)이란 인물이 있다. 1594.4.10 경상도 순무어사로 내려왔다가, 1595.3.28 경상우도순찰사(경상우도 관찰사, 監司)로 다시 내려왔다고 난중일기에 기록이 있다.

최근에 필자는 서성의 문집을 일별할 기회가 있었는데, '약봉유고(藥峰遺稿)'에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한산도(閑山島)에 관련된 시를 여러편 발굴하였다.

약봉(藥峰) 서성(徐渻)은 본관이 대구이다. 1558년(명종13년)에 출생해서 1631년(인조9년)에 사망했다. 부친은 서해(徐嶰)이고 외조부는 안동 임청각(臨淸閣)을 지은 고성이씨 이명(李洺)의 아들 이고(李股)이다. 부인은 송녕(宋寧)의 딸 여산송씨이며 영의정을 지낸 송일(宋軼)의 증손녀이다.

이고가 사위와 딸 부부를 위해 지어준 집과 누정이 안동시 일직면에 있는 유명한 별당 소호헌(蘇湖軒,보물 475호)이다. 서성의 모친 고성이씨 부인은 대구서씨 후손들이 신사임당 만큼이나 기리는 분이다. 夫君인 서해가 23세에 요절하자, 가산을 정리해서 시숙이 있는 한양으로 이사를 했고, 아들 서성을 이율곡(李栗谷)에게 배우도록 하였다. 이때 학비를 보태려고 음식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그것이 약과(藥果)와 약식(藥食)으로 이름 지어 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서성의 5대조 서미성(徐彌性)은 조선개국공신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사위이다. 서미성의 둘째아들이 동문선(東文選)을 지은 유명한 학자 서거정(徐居正)이고, 장남 서거광(徐居廣)의 현손이 서성이다. 조부는 文科를 하여 예조참의를 지낸 서고(徐固)이다. 서미성의 사위에 좌의정을 지낸 삭녕최씨 최항(崔恒)이 있다.

서성의 넷째 아들인 서경주(徐景霌)는 선조의 첫째딸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인하여 달성위가 된다. 서경주는 명량해전 때 전라감사 황신(黃愼,西人, 본관은 창원이다)으로 부터 임지를 이탈했다고 무함(誣陷)을 받아 한양의 감옥에 갇힌, 나주목사이며 전 순천부사 안촌(安村) 배응경(裵應褧)을 우찬성 심희수(沈喜壽)와 함께 신구한다. 전란이 끝난 후 안촌은 백암(栢巖) 김륵(金玏, 체찰부사로서 한산도를 방문하여 이순신을 지원함)과 함께 경북 영주에 이산서원(伊山書院)을 건립하고 퇴계집을 간행하는 등의 퇴계존숭작업을 한다.

그 서성이 이순신이 쓴 시의 운을 따서 시를 짓고, 또한 한산도와 남해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지은 것을 필자가 최근에 찾았다. 약봉유고를 보면 서성은 어사와 감사로 경상우도에서 활동할 때 경험한 것을 시로 많이 남겼는데, 모두 30여수의 시를 남겼다.

아래 첫 번째 시의 중요한 의미는 저 운을 넣어서 이순신이 먼저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아래 두 번째 시의 중요한 의미는 제승당 현판에 이순신이 지은 시의 운을 따라 시를 지은 것인데, 100여 년 전 까지 서성이 지은 제승당 시에 운을 따서 지은 시가 여러 편 있는 것이다.

서성의 후손들과 포천문화원과 향토사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진해와 통영, 여수의 향토사학자들과 이순신연구자들의 연구와 학술회의 등을 통해 이순신과 한산도의 위상을 더 높이기를 바란다. 이런 자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포천과 통영에서 약봉 서성의 학술회의 한번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학술회의를 못하면 특강이라도 한번하면 좋겠다.

명량해전(鳴梁海戰) 현장에는 본관과 고향을 아는 장군을 단 한사람도 새기질 못했으며, 500억이나 들인 남해 이순신 순국공원에도 노량해전(露粱海戰) 참전자는 단 한명도 안 새겼다. 향토사학자나 공무원, 이순신연구자들이 인물은 아무도 연구도 안했고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다.

경남도와 통영시는 한산해전 역사관(기념관)을 만들어야한다. 한산도에 왔던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자료집을 만들고 역사관을 만들어야 한다.

이름과 본관, 관직과 행력, 서로간의 관계를 새겨야한다. 그러면 전국의 수 많은 문중과 후손들이 휴일과 방학을 이용해서 한산도를 방문할 것이고 ,그러면 펜션과 횟집과 식당, 시장과 주유소등에 돈이 돌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관광이다.

亂中日記와 狀啓에는 사량도(蛇梁島)란 지명이 20여회나 기록이 있다. 필자가 7년 전쯤에 통영시와 사량면사무소에 전화를 하여 난중일기에 나오는 사랑도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선착장 등지에 안내판을 세우면 좋겠다고 하자, 통영은 이순신 유적지가 너무 많아서 그까지꺼 다 못합니다라고 과장과 면장이 예기하더군요. 통영은 공무원들이 난중일기가 커피이름인지? 고구마이름인지를 모르는 수준이다. 그래서 한산해전 역사관하나 제대로 못 만든 것이다.

그런데 한산해전 참전자 하나도 모르고 통영관련 자료도 잘 모르는데 ,우물안 개구리 합창연습 수준으로 한산대첩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한산대첩축제에 이순신과 함께한 해전참전자 후손을 단 한번만이라도 초대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순신 후손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난중일기에 기록이 있는 ‘춘원포해전’ 자료도 2016년에 필자가 최초로 발굴하였다.

서울에서 대학나온 사람이 통영이 목포 옆에 있는지? 포항 옆에 있는지 모른다면 무식한 것이죠. 한산대첩문화재단 대표이사나 본부장, 시의원과 도의원, 시장과 국장, 과장과 팀장, 문화원장과 향토사학자들이 한산해전 참전자 중 본관과 고향을 아는 장군이 단 두명도 없다면 잘못된 겁니다. 관광통영을 말하는 것이 창피한 수준이 되는 겁니다

통영엔 한려수도를 조망할 수 있는 케이블카가 있습니다. 케이블카 탑승장소나 전망대에 이순신과 함께한 주요 장군들과 군관들을 100명 또는 200명 정도 엄선하여 안내판을 게시하면 좋겠다. 필자가 통영시장이나 케이블카 회사 사장이라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다. 그렇게 해놓으면 전국의 각 문중이나 후손들이 대대로 단체나 가족여행을 와서 기념사진도 찍어갈 것이다. 만약에 기념비(명패)로 새겼다면 기념비를 탁본해갈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탁본을 해간다면 지켜보는 촌로들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흐를 장면인 것이다. 장소야 제승당 가는 길에 만들던지, 또는 섬으로 가는 유람선 선착장 주차장에 만들던지.

한산해전 참전자나 6년간 한산도 통제영에 왕래한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도 모르면서 치러지는 한산대첩축제는 제고되어야한다. 축제관련 아이템도 개선해야 한다. 어머니와 할머니 성명이나 고향도 모르면서,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양반이라고 주장해봤자 잘못된 생각이란 것이다.

<영남 이순신연구소> 경북 예천 박갑로 010-2799-5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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