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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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말할 수 없다
  • 포천일보
  • 승인 2023.02.2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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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포천문화원 부원장
김현철|포천문화원 부원장

『장자(莊子)』에는 인간은 모두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과격한 주장이 적혀 있다.

「추수(秋水)」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물 안 개구리(井蛙)’가 바다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공간’ 에 갇혀 있기 때문이고, ‘여름 벌레(夏蟲)’가 얼음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고집하기 때문이다(井蛙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夏蟲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공간’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의 함의는 무엇일까? 우리 삶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진다. 이 형식을 표현하는 세계(世界)와 우주(宇宙)라는 말이 있다. 세계는 시간[世]과 공간[界]을, 우주 역시 공간[宇]과 시간[宙]을 뜻한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의 삶의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 삶의 형식은 동양 사상 뿐만 아니라 서양 근대 철학을 관통하고 있는 합리성의 기본 준거이기도 하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라는 근대철학의 두 물길을 통합한 호수와 같은 존재로 평가된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인간에게 본유관념(innate ideas)이라는 이성적 능력이 있어서 경험하지 않아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둘을 통합한 칸트의 생각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감성으로 인식의 재료를 받아들여 이성으로 인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는감각소여(感覺所與, the given)라고 불리는 이 인식의 재료가 주어지는 형식을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인식의 재료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제공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인간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장자의 주장이 그다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준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이다. 그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내 삶의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닌가? 장자는 이 존재가 빠지기쉬운 치명적인 함정을 냉엄하게 지적한다. “‘자기 삶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얻은 인식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曲士]’은 진리를 알 수 없다. 자신의 경험에 갇혀있기 때문이다(曲士不可與語至道者 束於敎也).” 곡사(曲士)는 ‘한 모퉁이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일곡지사(一曲之士)의 줄임말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관점, 변수, 혹은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퉁이들이 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이 모퉁이는 늘어난다. 아주 단순한 일에도 수십 개에서 복잡한 일에는 수백 개의 모퉁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협소하고 오직자신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사람을 곡사(曲士)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물에 갇힌 존재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가치관이 이 협소함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특히 많은 사람들과 관계된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의 판단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자신의 경험 밖에 있어서 생각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모퉁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 두 사람의 다툼에서도 “양쪽 말 다 들어봐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 생각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자신의 주장을 하지 말아야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각자의 삶의 이력 또한 타인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에 공동체를 위한 귀중한 자산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서로를 우물 안 개구리의 처지에서 구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로 공동체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의 가치관을 담은 목소리는 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 자신의 식견이 뛰어나다고 믿는 사람이 휩쓸리기 쉬운 강력한 관성을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가치관과 판단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다. 이 과도한 믿음이 때로는 강력한 바이러스처럼 증폭되기도 한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구조 속에 있다는 것, 즉 우리 삶에서 대면하는 사태의 모든 측면을 볼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타인에 대한판단과 비판을 자제하는 대신에 타인의 삶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 이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것은 아닐지? 과거 우리가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시절에 우리의 삶의 자세가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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