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면암 선생 혼(魂)이 깃든 대마도를 찾아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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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면암 선생 혼(魂)이 깃든 대마도를 찾아서(상)
  • 포천일보
  • 승인 2016.04.0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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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버린 조국, 울렁이는 파도에 면암 선생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3월25일 일본 대마도 땅에는 새벽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옆방에서 누군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노래가락에 맞춰 누군가 구슬프게 하모니카 연주를 한다.

평소 면암 선생의 고귀하고 숭고한 뜻을 알기에 최씨 중앙종친회에서 대마도 기행을 한다기에 선거철 바쁜 일정에도 선뜻 따라 나선 후 하루 밤을 보낸 다음 날이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께서 끌려와서 1907년11월 순국하셨던 그날도 아마 대마도 이 땅에는 구슬픈 비가 부슬부슬 내렸을 것이다. 부슬비에 서글픈 하모니카 소리를 들으니 면암 선생의 마음인 듯 싶어 착잡하기 그지없다.

▲ 최씨 중앙종친회장과 그 일행이 수선사에 모셔진 면암 선생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1. 청량사에서 고운 최치원 행적을 보다

24일 경주최씨 중앙종친회가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순례에 동참하기 위해 출발장소인 경기 하남시에 소재한 고운 최치원 도서관에 도착했다. 이 도서관은 경주최씨 종친회가 시조인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고 운영도 한다. 최씨 종친회에서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출발했다. 경북 안동에서 최씨 종친 서너명이 버스에 올라타고 고운사로 향했다. 이 사찰은 최치원 선생께서 불교와 유교, 도교의 가르침을 통달하였다 하여 선생의 호인 고운을 빌어서 고운사로 명명하게 됐다고 한다.

▲ 경북 봉화군에 소재한 청량사에 들렀다. 이 사찰은 한국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입산수도한 곳이라 의상봉이라 불리는 기암괴석으로 된 봉우리가 있다. 보살봉과 연화봉, 축용봉 등 12개 암봉이 있고,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등 12개의 대와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터가 있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이어 경북 봉화군에 소재한 청량사에 들렀다. 이 사찰은 한국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입산수도한 곳이라 의상봉이라 불리는 기암괴석으로 된 봉우리가 있다. 보살봉과 연화봉, 축용봉 등 12개 암봉이 있고,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등 12개의 대와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터가 있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 최병주 최씨 중앙종친회장과 최광식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마시고 머리가 총명해졌다는 총명수 약수터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청량사 사찰을 나와 청량사가 굽어보이는 전망이 좋은 어풍대를 돌아가다 보면 총명수가 나온다. 총명수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 물을 마시고 총명함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세모꼴 모양의 바위 틈 사이에 물이 고여 있다. 그 옛날 고운 최치원 선생은 시원하고 맑은 이 물을 마시고 총명해졌다고 한다. 청량산은 바위산인데 높은 이곳에서 물이 나온다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지금은 물을 마실 수 없다고 한다. 아쉽지만 이 물을 떠서 이마와 가슴, 그리고 배에 대어 본다. 그러면 머리에는 지혜가 가슴에는 포용력이 배에서는 건강이 나온다고 해서 필자도 따라 해 봤다. 그러고 나니 머리가 깨끗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이제 부산을 향해 떠난다. 그리고 운행하는 버스안에서 각자 자신의 소개의 시간을 갖는다. 최씨 중앙종친회장을 비롯한 최광식 전 문화관광부 장관 등 종친회원 20여명이 함께 담소를 나누며 여행길에 올랐다.

♯2. 망해버린 조국, 끌려가는 면암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부산에서 1박을 한 후 부산 종친회에서 나온 사람들과 함께 대마도행 배에 몸을 싣는다. 이어 배가 출발하기 시작한다. 부산에서 대마도 이즈하라 항까지는 130Km로 시속 70Km로 항해하면 2시간 10분이 걸린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오전 9시 바다에 나오자 2m높이 파도에 배가 울렁거린다. 120여년전 조국이 일제에 망하고 포로가 되어 이 바다를 건너던 74세의 면암 선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 부산항에서 대마도 이즈하라 항으로 여행객을 싣어보내는 고속훼리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傖義討賊疏)를 올려 심경을 토로하고 조선 8도민에게 표고문을 내려 항일투쟁을 호소하는 뜻으로 납세거부, 철도이용안하기,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 운동을 촉구한다. 그리고 74세의 고령에도 임병찬 선생을 비롯한 80여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한다. 조선을 침탈한 일본의 배신을 따지는 16개 조항의 의거소략(義擧疏略)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한 후 전북 순창에서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막상 싸움터가 나가보니 일본군이 아닌 조선관군과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이를 목격한 면암 선생은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하여 결국 항복하게 되고 일제는 한양에 있는 조선통감부로 이송한다. 선생께서 군법재판을 받은 후 일제는 면암 선생으로 인해 조선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면암 선생을 대마도 유배키로 한다.

한양에서 6개여월간의 수감생활을 한 후 면암 선생은 초량(지금의 부산포)을 거쳐 대마도를 향해 떠나는 일본 군함에 몸을 싣는다. 군함에 오르기 전, 선생은 아끼던 제자 임병찬 선생에게 물 한동이를 떠오라고 이르고 자신은 버선을 벗어 모래흙을 담는다. 대마도에 끌려가서도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선생의 굳은 의지였을 것이다.

제자와 함께 탄 일본 군함에서 선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일제에 망한 조국, 늙은 몸을 이끌고 조국 땅이 아닌 침략자에게 몸을 의탁해야 한다는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마도를 향해 떠난 그날은 아마도 대한해협 바다에는 파도가 높았을 것이다. 울렁이는 파도, 조국을 잃어버린 심정에 선생께서는 마음속으로 통곡하고 또 통곡했을 것이다. 선생의 상념에 잠긴 모습을 보는 듯 싶다.

♯3. 면암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수선사를 찾아서

울렁이는 파도에 면암 선생의 여정을 생각하는 동안 잠이 스르르 든다. 잠에서 깨어나니 대마도로 보이는 섬이 보이고, 잠시 후 대마도 이즈하라 항에 도착했다.

▲ 대마도 이즈하라 항 인근에 조선통신사 대마도 방문 200주년을 맞아 그렸다는 벽화다. 대마도 시내 곳곳에 조선통신사가 대마도 방문 200주년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배에서 내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고, 부산에서부터 함께 동행한 가이드가 대마도 시가지 벽면에 새겨진 과거 조선통신사와 일본인이 함께 그려진 벽화의 유래를 설명한다. 이후 일본 식당에서 도시락 점심식사를 한 후 면암 선생께서 작고하신 후 이틀 동안 시신이 머물렀다는 수선사로 향했다.

▲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순례에 참가하는 일행이 선생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수선사 앞에서 면암과 수선사 설명을 듣고 있다.

면암 선생이 대마도에 도착한 후 일본 음식과 물을 거부한 후 30여일만에 작고하니 선생의 기개를 높이 산 일본인 승려가 조선으로 떠나기 전 이곳 수선사에 시신을 모셨다. 이 사찰에서 선생의 시신을 모셨다가 장례를 치른 뒤 부산으로 향했다.

수선사에 도착한 일행은 가이드가 수선사 내력과 면암선생 시신이 머무르게 된 연유 등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최근 이곳 사찰 주지는 한국인 관광객을 꺼려해 면암선생 영정이 모셔진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다행히 가이드가 사찰관계자에 면암 후손들이 왔다고 설득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실내로 들어가니 20여평 남짓 공간에 일본 특유의 신들이 모셔서 있고, 그 앞에 면암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사찰 관계자가 면암가에서 왔다는 가이드의 말을 들었는지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줬다.

▲ 면암의 직계 5세손인 최진욱씨가 면암 영정에 술을 올리고, 그분의 뜻을 기렸다.
▲ 면암 선생께 제사를 올린 최씨 종친들이 수선사 관계자에게 십시일반 돈을 거출해 고맙다는 답례로 전달했다.

최씨 중앙종친회 참석자들은 면암선생 영정 앞에 제물을 차린 후 전통 예법에 따라 제사를 올린다. 제사를 올린 후 최씨 종친들은 각자 십시일반 돈을 거출해 면암 선생을 모신 것에 감사한 뜻으로 수선사 관계자에게 전달한 후 경내를 둘러본다. 사찰에서 잘 보이는 곳에 ‘대안인 최익현 선생 순국지묘’라고 새겨진 비문을 살펴본다. 제사를 올리고 사찰 경내를 둘러본 후 나오면서 면암 선생의 시신을 일본인이 잠시 동안이라도 모셨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찰을 둘러보고 나오는 동안 면암 선생께서 대마도에 도착한 후의 여정을 생각해 봤다.

1907년11월의 추운 겨울, 면암 선생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일본 헌병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 도착하자 일본인 경비대장은 “일본 땅에서 일본 음식을 먹게 되었으니,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군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내 그럴 줄 알고 조선에서 물 한 동이를 떠 왔노라. 나는 오늘부터 이 조선의 물만 마실 것이니 너희들의 명을 따르지 않겠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일본군이 주는 물과 음식을 거절한 채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이 계속되는 동안 스스로 삶이 얼마남지 않았다 것을 알았던 것일까? 면암 선생은 함께 온 제자 임병찬 선생에게 유서를 대신 작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단식을 하려는 제자들에게는 항일운동을 해야 하니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면암 선생은 대마도에 끌려 온 후 조선에서 가져 온 물 한 동이를 비운 후 계속되는 단식으로 30여일만에 작고한다. 작고하신 후 장례는 배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에 치러진 후 부산으로 운구되었다.

선생께서 작고하신 후 선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뜻있는 유지들은 수선사에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묘’라는 비를 1986년에 세웠고, 한국정부는 이보다 앞선 1962년 면암 선생에게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바 있다.

수선사에서 나온 일행은 도보로 또 한명의 비운의 한국인이었던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찾아간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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