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면암 선생 혼(魂)이 깃든 대마도를 찾아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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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면암 선생 혼(魂)이 깃든 대마도를 찾아서(하)
  • 포천일보
  • 승인 2016.04.0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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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의 선비정신, 그의 생가터 복원으로 포천정신 고양을

♯또 다른 비운의 한국인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

덕혜옹주는 1912년 조선말 고종의 두 번째 부인 귀인양씨 딸로 태어났다. 1931년 5월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고,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일본호적을 만들고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했지만 이혼한 후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됐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어 전해지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됐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이 지나서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다.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곳 대마도에서 덕혜옹주 기념비를 보니 또 다른 비운의 한국인인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일행은 덕혜옹주 결혼비와 대마도 대표신사인 하치만궁에 이어 나카라이토슈 문학관을 둘러본 후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식사를 한 후 숙소에 들어와 일행과 면암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부슬비가 내리고 구슬픈 하모니카 연주소리

이튿날 새벽 창문을 열어 보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다. 옆방에서 누군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연주하는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온다. 포천에서 이곳 대마도에 오는 동안 면암 선생이 끌려온 생각을 많이 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곳에 온 후 선생께서 고인이 되어 머물렀다는 수선사에 들러 선생에 관한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일까? 하모니카 연주와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고난의 길을 걷다가 작고하신 선생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이같은 생각이 끝나갈 무렵 일행은 다른 일정이 있다며 약속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버스를 타고 한국전망대와 에보시타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카미자카 전망대를 거쳐 이즈하라 항구에 도착한 것은 26일 오후 3시경이다. 간단한 출국 심사를 마치고 다시 부산행 고속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잠시후 부산행 배가 출발하자 문득 죽엄의 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던 면암 선생의 운구행렬은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을 해 봤다. 죽음으로서 조국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의인, 왜인들에게 결코 항복하지 않았던 인물, 그가 바로 면암이다. 배가 현해탄을 건너는 동안 말없이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면암 선생을 생각하며 그 분의 고향인 포천의 현실을 다시 되새겨 봤다. 올곧은 의인의 고장인 포천지역은 면암 선생의 정신은 온데 간데 없다. 선비의 고장 포천의 자존심은 사라지고 오로지 현실에 안주하는 지역현실을 생각하니 면암 선생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지난해 포천쳅터 모임을 함께하고 있는 최진욱씨에게서 ‘면암선생제만록’이라는 3권의 책자를 받아 읽었봤던 생각이 난다. 이 책은 포천지역 면암선생숭모사업회가 간행한 3권의 책이다. 이 책은 대마도에서 작고하신 면암 선생의 시신을 부산에서부터 논산까지 운구하는 과정에 관한 기록이다. 계속되는 동안 노지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이다. 선생의 기개를 높이 산 양반에서부터 관리, 서민, 기생에 이르기까지 운구행렬이 지나가는 고장마다 제사를 지냈다. 심지어는 당시 일제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까지도 애도의 뜻을 보냈다고 한다.

♯민족의 자존심, 면암 운구행렬은 논산에서 멈추고

죽엄의 몸으로 부산에 도착한 선생의 운구행렬은 고향인 포천을 향해 떠났다. 그런데 출발한 직후 지나가는 마을마다 군중들이 선생에게 제사를 올리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선생의 운구행렬의 목적지는 한양을 거쳐 포천이었다. 선생의 고향 포천은 한양을 거쳐야 갈 수 있다. 포천까지 선생의 시신을 운구하면 큰 소요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일제는 논산에서 행렬을 멈추도록 하고, 그 시신을 1907년 충남 논산 상월면 무동산 국도변에 안장했다. 이후 참배객이 많아지자 1910년 일제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묘를 옮겼다. 충남 청양군 목면에는 모덕사라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면암 최익현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14년 창건되었다. 매년 4월13일 항일의거기념 면암 최익현 선생 추모제가 열린다.

결국 대마도에서 운명을 달리한 면암 선생의 시신은 지금까지도 고향인 포천에 오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충남 논산과 예산에 묻혔다. 지하에서 선생은 포천의 현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역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지도자, 시민정신이 사라진 포천, 이런 모습에 얼마나 실망하고 한탄하실까 하니 마음이 무거워 진다.

♯면암의 선비정신, 그의 생가터 복원으로 포천정신 고양을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지였던 하남시 고운 최치원 도서관으로 이동하는 동안 포천의 현실을 생각하니 답답함이 밀려온다. 지역정신을 고양하고 관광자원을 만들기 위해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은 그들의 역사적 인물을 찾아 기념관을 짓고 홍보하기 바쁘다. 그런데 포천지역에서는 최익현 선생이라는 큰 인물이 존재했음에도 이렇다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필자는 포천정신을 되찾기 위한 방안으로 몇몇 분들에게 면암 선생 생가터 복원사업 및 면암 기념관을 건립 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이제 잃어버린 포천정신을 되찾기 위해 면암 최익현 선생 생가터 복원사업을 포천시와 시민들에게 제안한다. 민족정신을 살리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면암 선생의 정신을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재해석 하고, 이를 포천정신으로 계승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래세대에게는 교육의 장을 만들고 주고, 면암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한 장면을 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물론 관광자원의 역할도 함께 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방안으로 포천시민이 함께하는 추진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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