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역사기행]위정척사 사상 포천에서 묻다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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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역사기행]위정척사 사상 포천에서 묻다 - 2편
  • 최동원 포천시청 학예연구사
  • 승인 2015.03.1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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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勉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다
▲ 최동원 포천시청 학예사

최익현의 고향인 가채리에는 그의 후손들이 아직까지도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후손들 중 선생의 4대손이며 지역에서 그의 뜻을 계승하고 계신 최종규 씨는 구한말 개화사상가들이 비판했던 면암선생의 ‘위정척사’ 사상에 대해 “개화는 주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라가 있어야 개화도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것이 면암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주장했던 ‘위정척사’ 사상이다.

고종 13년(1876) 일본은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과 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면암은 그 길로 도성으로 와 궐문 앞에서 도끼를 가지고 엎드려 조약의 불가함을 외쳤다.

이것이 유명한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義疏)」인 ‘오불가척화소(五不可斥和疏)’이다. 그 내용을 보면 1.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자주의 위기, 2.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산업 파괴, 3. 일본은 서양의 적과 같으며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 예의의 위기 조장(왜양일체론), 4.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자 약탈의 위기, 5. 금수(짐승)와 같은 일본과 문화 민족인 우리가 교류할 때에 도래할 문화의 위기 등 이다.

이는 300여 년 전 임진왜란으로 우리 국토가 유린당했던 과거를 통해 일본인들의 잔악한 품성을 익히 알고 있음을 알리고, 통상조약 체결 후 우리에게 닥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위기를 통찰한 주장이다. 또한 일본보다 우월한 우리의 문화의식을 표현한 결과라 할 것이다. 면암의 ‘왜양일체론’은 단순히 일본과 서양을 동일하게 간주하는 배타적 척사론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소로 인해 최익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약 20여 년 이상 고향인 가채리에 머물면서 칩거하였다. 이 시기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운동’ 등 일본과의 분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던 때로 면암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최익현은 이 시기 향후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항일운동의 전개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투쟁의 방식이 변화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전까지 상소라는 언론수단을 통해 개인적인 방법을 추구했다면, 칩거 이후에는 집단적, 무력적인 항일의병투쟁 형태로 바뀌었다.

상소라는 수단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닥친 국난을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고종 32년(1895)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리며 친일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고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하는 등 정치의 폐단과 일본을 배격하는 상소도 끊임없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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