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사는 세상] 신중식 포천사랑의 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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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사는 세상] 신중식 포천사랑의 교회 목사
  • 포천일보
  • 승인 2016.10.2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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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대부분 주말부부 생활에도 6명 자녀 낳고 양육

신중식(56세) 포천사랑의 교회 목사가 대한예수교 장로회 서울북노회에서 주는 다자녀 모범상을 수상하게 됐다. 시상은 오는 10월25일에 있을 예정이다.

신 목사 슬하에는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공중 수의사로 재직중인 큰 아들부터 초등학교에 다니는 9세 늦둥이까지 모두 6명의 자녀가 있다. 요즘 한 자녀도 키우기 힘들다고 하는 시대에 6명의 자녀를 두게 되기까지 신 목사에게는 남모를 사연들이 많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신중식 목사는 전통을 중요시하는 유교집안 태생이다. 순천대학교에 법학을 전공한 신 목사는 총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학생과 학교, 정부의 3중적 입장에서 고민했다. 그러나 집회가 계속되면서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경찰은 막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서로의 입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가 자기입장만 고집하지 않을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면서 순천대학 조교생활을 하면서 장로회 신학대학교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시절 신 목사는 같은 학교 원예학 임순정씨와 열애 중이었다. 그러나 임씨가 부산 가덕도의 원예교사로 발령이 나면서 두 사람은 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주말 연애커플이었던 두 사람은 91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됐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신 목사가 대학에서 조교를 하면서 공부하는 반면 부인 임 여사는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부인이 주말마다 순천으로 가 남편 신중식 목사를 만나 해후를 풀었다. 이같은 생활을 3년간 한 이들 부부는 함께 살기로 하고 신 목사가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에서 4전5기 끝에 서울에 있는 장로신학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3년간 신 목사는 또다시 주말부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목회자 길을 걷기로 한 신 목사는 2008년 목회상담학 석사학위를 받기까지 서울과 부산을 주말마다 왕래하게 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서울에서 학생신분으로 공부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부산에서 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그런데 주말부부 생활을 하던 이들 부부에게 신기하게도 6명의 자녀가 생겼다. 신 목사는 “남들은 아기를 갖고 싶어도 안 된다고 하는데, 우리 부부는 만나기만 하면 애기가 생겼다”면 농담을 한다. 신 목사 부부는 첫째인 아들과 둘째인 딸을 낳았으니 이제 자녀는 그만 갖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피임을 했는데도 이상하게도 셋째가 태어나고, 이어 넷째가 태어났다. 이후에도 다섯째와 여섯째까지 생겼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생긴 아기를 낙태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신 목사 부부는 아이들을 낳았다. 신 목사는 “아이를 그만 갖겠다는 생각에 피임을 했지만 자궁외 임신이 된 경우도 있었다”면서 “우리 부부의 의지와 관계없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역사였다고 생각해 감사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6명의 자녀를 둔 신 목사에게는 혹독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항서교회 부목사로 재직하던 신 목사는 부산에 있는 교회 담임목사로 가기를 희망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당시 10전10패 였다. 희망하는 교회마다 자녀가 많다고 거절했다. 5남1녀의 교육비와 생활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부산에서 목회를 하지 못하던 신 목사는 다시 멀리 떠난다. 재정여건이 아주 열악한 광주광역시에 있는 작은 교회가 초빙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주말부부가 된 것이다. 이번에는 부인이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신 목사를 찾게 된다. 힘들게 찾은 이곳 교회에서 신 목사는 4년간 정말 열심히 목회자 활동을 한다. 그러는 동안 교회에서 예수의 제자 양육하고, 호남신학대학교에서 후진양성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또 다시 떠나야 할 처지가 됐다. 그래서 2013년10월 포천 땅을 밟게 된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포천사랑의 교회다. 3년전 이 곳 교회로 왔을 때 미자립(재정이 빈약해 지원을 받는 교회) 교회이자 모든 게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는 교회 체계를 만들고 미자립 교회가 자립교회가 되었다. 34년만에 이루어진 자립이다”고 신 목사는 말한다.

신 목사가 순천에서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광주광역시로, 이제는 포천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부인 임 여사는 부산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자녀들을 양육해 왔다. 그러면서도 주말마다 신 목사를 만나기 위해 순천과 광주, 포천으로 향했다. 봉고차를 이용해 혹은 버스를 타고 먼 거리를 왕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직녀와 견우의 해우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서로 만나는 시간이 많지 않음에도 자녀들의 출산은 다산으로 이어졌다.

이같은 환경에서도 자녀들은 훌륭하게 자라 주었다. 첫째 아들 정인군은 국립 경상대학 수의학과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 수의사 고시에 합격한 후 공중수의사로 합천에서 근무하고 있다. 둘째인 지인양은 장로회신학대학 기독교육학과에 재학하면서 서울 목양의 교회 교육전도사를 하다가 현재는 포천사랑의교회 교육전도사로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부산대에 재학중인 셋째와 연극배우나 모델이 꿈인 포천고 3학년인 넷째, 포천중학교에 다니는 다섯째, 늦둥이로 태어나 신 목사의 돌봄을 받고 있는 유암초 2학년인 여섯째는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포천으로 옮겨 온 후 신 목사는 3명의 자녀들과 함께 생활한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을 위해 식사준비는 물론이거니와 빨래, 그리고 청소까지 엄마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맡아 한다. 신 목사는 “흔한 학원에 보내지 않고 부모의 돌봄이 부족했지만, 전인적(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으로 성장해 주었다. 첫째도 그랬지만 다른 동생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목회활동을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니다. 가는 곳마다 빚 더미 교회이거나 혹은 미자립 교회 등 해야 할 일이 많은 교회였다. 이런 교회들을 반석위에 굳건히 세워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신 목사는 서울북노회 특별위원회 저출산 및 고령화 대책위원장을 맡아 자녀 많이 갖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자녀출산 저하로 우리나라 인구가 감소해 심각한 사회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활동이다. 자녀를 많이 출산하는 것과 위기가정을 돌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신 목사는 믿고 있다. 자녀가 많아 순천과 광주, 포천으로 힘든 길을 걸으면서 신 목사의 생각은 예수님의 고난이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신 목사는 “우리나라 교회 현실을 보며 실망도 했지만, 저에게 주어진 삶이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인격과 형상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자살과 사별 혹은 질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런 사람을 치유하고 함께해야 하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위기상담 전문가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는 신 목사의 모습에서 진정한 목회자의 길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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