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역사기행] ‘위정척사’ 사상을 포천에서 묻다 -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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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역사기행] ‘위정척사’ 사상을 포천에서 묻다 - 1편
  • 최동원(포천시청 학예연구사)
  • 승인 2015.01.1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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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민족의 선봉장이 싹트다
▲ 최동원 학예연구사(포천시청 근무)

2007년 9월 27일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는 매우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조선말기 외세로부터 민족 고유의 전통을 지키고자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외치며 외세침략으로부터 우리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다 타향에서 그 생을 마감했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선생의 ‘생가터기념비’ 제막식이 개최된 것이다.

서울에서 의정부시를 지나 시원스럽게 뻗은 국도 43호선을 타고가다 보면 포천시에 다다른다. 포천삼거리에서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시청쪽으로 진입한 후 도심을 가로질러 10여 분 가다 보면 가채리와 함께 ‘채산사(茝山祠)’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면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천석 정도 수확 될 만한 논을 사이에 두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이 구한말 나라를 위하는 일념으로 민족운동을 펼쳤던 대표적 인물인 최익현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 2007년9월 건립된 면암 최익현선생 생가터

선생의 고향인 신북면 가채리는 1912년 행정구역상 포천군 내북면(內北面) 이가채리(二加采里)였는데, 가랑산 아래 자리하고 있어 ‘가취’ 또는 ‘가채’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가채리 전역과 초가채리(初加采里) 일부 그리고 서면(西面)의 호병동 일부를 병합하여 가채리라 하고 신북면에 편입시켰다. 가채리에서도 최익현 선생이 태어난 마을은 경주 최씨가 많이 살고 있어서 최가채리라고도 불렸다. 약 450여 년 전 경주 최씨의 중시조인 한산군수 최수준(1472~1527)이 낙향하여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마을인 듯하다.

최익현선생은 순조33년(1833) 음력 12월 5일 가채리에서 최대(崔岱)와 경주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골격이 남달랐고 눈빛이 빛나서 이를 기이하게 여겨 ‘기이한 사내아이’ 라는 뜻으로 기남(奇男)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의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는 면암(勉菴)이다.

최익현선생은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녔지만 그의 총명함은 가는 곳 마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1살 때 다시 양근(현 경기도 양평군)으로 이사했는데, 집에서 십여 리(약4㎞) 떨어진 곳에서 당시 대유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선생이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면암의 나이는 14살이었고, 이때부터 최익현선생이 조선말기 나라를 위해 충심을 다하며 외쳤던 ‘위정척사’ 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항로의 제자가 된 최익현선생은 문하생 중 단연 두각을 나타냈으며, 학문뿐만이 아니라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화서의 문하생들은 겨울이 되면 가끔 쌀을 거두어 떡을 해먹는 전례가 있는데, 최익현선생은 문하생들이 떡을 먹고 있을 때 책을 보며 떡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추운 겨울날 고생하시는 부모님 생각에 자신이 먹을 떡을 10여 리 떨어진 부모님에게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최익현선생의 인품을 격려하기 위해서 스승인 이항로는 그가 15살 되던 해에 ‘면암’이라는 글을 써주었는데 이것이 최익현의 아호(雅號)가 되었다.

면암은 20살에 청주 한씨를 부인으로 맞았고, 22살에 고향인 가채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23살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11등으로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승문원,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는 강직성을 보여주었다. 그가 순강원 수봉관으로 재직할 때의 일로, 나라의 의식을 관장하는 예조판서가 금지구역에 묘 쓰는 것을 도와준 일이 있어, 직접 그를 찾아가 “어찌 나라의 녹을 받는 대신께서 국법을 어기시려 합니까?”라고 호통 친 일화는 유명하다. 특히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며 올린 시폐상소(時弊上疏)는 당시 최고 권력가이자 임금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비판하고 시정을 건의한 것이다. 최익현은 이 상소에서 경복궁 복원공사를 중단하고, 수탈행정을 금지하며, 당백전과 사대문 문세의 징수를 혁파할 것을 촉구하였다. 면암은 당시 사헌부 장령이란 감찰기구의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대원군의 기세 앞에서 바른말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상소로 인해 그의 명성은 전국에 퍼지게 되었고 임금의 신임을 얻어 국왕의 비서인 승정원 동부승지와 재정 부서인 호조의 참판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대원군이 선비들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는 등 폭정이 계속되자, 이른바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리며 당시 집권층의 부패와 대원군의 실정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 상소로 대원군은 정치에서 물러났으나, 최익현 또한 부자간을 이간시켰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처럼 최익현선생의 강직성과 곧은 성품은 자신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했으며, 진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이었다. 그는 비록 가채리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온 백성을 품에 안은 진정한 민족의 선봉장이었던 것이다.

최동원 현 포천시청 문화체육과 문화유산창의팀 학예연구사, 국민대대학원 국사학과 박사 수료, 국민대 및 신구대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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