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역사기행]위정척사 사상 포천에서 묻다 -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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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역사기행]위정척사 사상 포천에서 묻다 - 마지막
  • 최동원 포천시청 문화체육과 문화유산창의팀 학예연구
  • 승인 2015.04.04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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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勉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다

최익현은 광무 9년(1905)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이완용(李完用) 등 5적의 처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면암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항일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갔다.

광무 10년(1906) 윤4월 최익현은 전라북도 태인(현 정읍시)에서 궐기하고 「창의소(倡義疏)」를 올리고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의 포고문을 돌리고 민중봉기를 촉구하며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항일의병운동은 일본 헌병대에 의해 저지당했으며, 결국 최익현도 체포되어 대마도로 압송되었다. 대마도로 떠나기 전 부산 초량 앞바다에 도착한 최익현은 버선에 모래를 채웠다.

그는 이렇게라도 해서 왜놈의 땅을 밟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면암은 일본 유배 생활에서도 그들이 주는 물과 음식을 일체 거절하며 굳은 의지로 마지막까지 민족을 위해 항거하다 끝내 타향인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 최익현이 순국하자 그의 고향인 포천 신북면 가채리에서도 그의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채산사(茝山祠)’이다.

면암의 죽음은 우리국토 뿐만 아니라 대마도 주민들도 슬픔에 잠기게 하였다. 민족의 자주권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다 순국한 그의 유지는 대마도민들에게도 귀감이 되어,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대마도를 떠날 때 원주민 대부분이 나와 면암을 전송했을 정도였다. 애도의 행렬은 시신이 부산에 도착하면서 더해졌다.

부산항 모든 시장이 문을 닫고 애도했으며, 가는 길마다 노제를 지내며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 당시 가는 곳 마다 선비들이 모여들자 일본 총독부에서는 충남 논산에서 선생을 가매장한 후 선비들을 강제로 해산시켰고, 면암은 2년 후에나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안장될 수 있었다.

면암의 순국 이후 그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서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였다. 충남 청양군 ‘모덕사’를 비롯해 항일의병을 봉기했던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 20 곳이 건립되었다. 광무 10년(1906) 최익현이 순국하자 그의 고향인 포천 신북면 가채리에서도 그의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채산사(茝山祠)’이다.

채산사는 1920년 면암의 영혼까지 두려워한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되었으나 1935년 재건했으며, 이후 훼철과 재건을 반복하다 1949년 해방 이후 복원하여 최익현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였다. 현재의 채산사는 노후 된 것을 1975년 다시 해체ㆍ복원한 것이다. 채산사는 앞뒤가 넓게 트인 들판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문과 사당 한 동이 남동향을 바라보고 일렬로 배치된 구조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사당 문을 열면 중앙에 최익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좌측 곁에 영정이 있다.

면암의 영정은 관복 차림의 전신좌상인데, 그 얼굴을 보면 “네놈이 내 나라 우리 민족을 빼앗으러 왔느냐” 라고 하면서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다. 그의 영정만 봐도 그가 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알 수가 있다. 현재 채산사는 경기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9월 11일(음력)에는 최익현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향사를 지내고 있다.

채산사에서 뒷산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면암의 선조인 신라말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을 제향하는 사당인 ‘청성사(淸城祠)’가 있다. 위에 조상 아래에 후손을 모신 형태이다. 청성사도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최익현의 후손인 최종규 씨는 면암 유적지를 방문하는 답사자들에게 “면암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 우리들도 당면한 어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꿈을 위해, 정의를 위해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라.”라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 최익현 연보

1833(순조 33) 12. 5 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

1843(헌종 9) 화서 이항로(李恒老)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

1846(헌종 12) 이항로에게 ‘면암(勉菴)’이란 아호 하사

1855(철종 6) 3. 별시문과에 급제

1865(고종 2) 7. 신청현감 임명, 청백리 녹선(선정)

1868(고종 5) 9. 사헌부 장령 재직 시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한 ‘시폐상소’ 올림

1876(고종 13) 1. 22 강화도조약을 반대하며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義疏)’ 주장

1895(고종 32) 12. 3 단발령 철폐 주장

1906(광무 10) 4. 13 ‘창의소(창의소)’를 올려 민중봉기 촉구. 전북 태인 의병 봉기

1906(광무 10) 6. 27 일본에 의한 의병 해산. 일본 헌병대에 체포

1906(광무 10) 7. 8 일본 대마도로 압송 수감

1906(광무 10) 11. 17 일본의 만행에 단식 항거하다 순국

1909(융희 3) 11. 4 충남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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