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 선생 혼을 찾아가는 길’…특별한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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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선생 혼을 찾아가는 길’…특별한 역사기행
  • 포천일보
  • 승인 2017.06.0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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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북면과 최씨문중, 주민자치위원회 공동 최익현 선생 기리는 행사 마련

포천 가채리 출신으로 구한말 의병장이자 조선의 마지막 선비였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뜻을 기리는 행사가 추진된다.

포천시 신북면(면장 양영근)은 신북주민자치위원회와 함께 오는 8월15일 신북체육문화센터에서 포천지역 초중고 학생과 일반인 500여명을 대상으로 ‘면암 어디까지 알고 있니?’라는 퀴즈대회를 개최한다. 최익현 선생이 행적에 관한 퀴즈를 통해 면암의 시대정신을 되새겨 보고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겠다는 의도다.

이와 함께 면암 최익현 선생이 아사한 일본 대마도를 찾아가는 2박3일 일정의 ‘면암의 혼을 찾아가는 길’ 역사기행도 마련된다. 역사기행은 신북면사무소를 출발해 가채리 생가를 방문하고 충복 청양 모덕사와 충남 예산의 최익현 선생 묘소 참배를 한 후 부산에 이어 대마도 수선사에 이르는 일정이다.

‘면암 혼을 찾아가는 길’의 기행은 퀴즈대회에서 선발된 30명과 해설사 최씨문중, 주민자치위원 10명 등 총 40이 함께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추진을 위해 포천시와 경주최씨 가채리문중, 신북면주민자치위원회가 총 1400여만원을 출연할 계획이다.

한편 양영근 신북면장은 “조국을 위해 숭고하게 희생하신 면암 선생의 시대정신을 되새겨 보고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마련했다”면서 “역사의식 함양은 물론 학생들의 역사 교육에 도움이 주고자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행적>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출생했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했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에 앞장섰다.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했다가 사간원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대원군 세력과 제휴하여,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을 주장했다. 흥선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흥선대원군 이하응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왕의 아버지인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로 유배 당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에는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가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목을 자를 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격렬하게 반대하였다가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낙향,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을사의병)의 전개를 촉구했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했다. 단식을 중지하였으나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菴集)》(합 48권)이 있다. 그리고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대마도에 유배되어 사망할 때까지 기록을 담은 임병찬의 《대마도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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