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세이] 혼돈(混沌), 그 위대한 에포케(epo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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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세이] 혼돈(混沌), 그 위대한 에포케(epoche)
  • 김현철 포천교육지원청 장학관
  • 승인 2018.01.05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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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철 포천교육지원청 장학관

『장자』「응제왕」편에는 혼돈(混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해의 임금을 숙(儵)이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은 혼돈(混沌)이라고 한다. 숙과 홀은 혼돈의 땅에서 서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융숭히 대접했다. 그래서 숙과 홀이 서로 의논하여 혼돈의 덕을 갚으려 했다. 혼돈의 얼굴에는 누구에게나 있는 칠규(七竅;사람의 얼굴에 있는 귀, 눈, 코, 입 등 일곱 개의 구멍)가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숙과 홀이 혼돈에게 칠규를 뚫어주기로 했다. 하루 하나씩 구멍을 뚫어주자 7일째가 되는 날 혼돈은 죽고 말았다.” 

혼돈(混沌)이라는 단어에 담긴 은유(隱喩)를 눈치 채셨는지요? 혼돈은 혼란[카오스]이 아니라 진리[道]이고 덕(德)입니다.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사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우리는 타인에게 자유로운 사유를 허용하고 있는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타인에게 칠규를 뚫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모두 사라져야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개인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프로이트주의에 훌륭한 철학적 구조를 제공함으로써 제2의 정신분석학 혁명을 가져왔던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말입니다. 라캉은 타인에게 칠규를 뚫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마저도 원래 내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처럼 타인의 사유가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지배하기 쉬운 시대는 없었습니다. 네트워크와 스마트 미디어의 발달로 현대인은 타인과의 접속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게 되었습니다(휴대폰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터넷, SNS, 그리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타인의 생각에게 지배를 받는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셈입니다. 정보의 홍수가 쏟아지는 그 과정에서 인간은 역설적으로 깊은 사유와 통찰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점점 덜 스마트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느낀다면 누군가 내 얼굴에 칠규를 뚫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신 또한 타인의 얼굴에 일곱 개의 구멍을 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것이 선의(善意)라도 말이지요. 그 선의라는 생각 때문에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칠규를 뚫기 쉽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을까요?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초보 시절부터 숙련자에 이르기까지 항상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에서 힘을 빼라’는 말입니다.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몸의 수련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그렇듯이 마음에 잔뜩 힘이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가진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물(事物)을 이해하고 관계를 다루는 능력인 ‘삶의 기술’ 또한 부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 어떤 사태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자신의 생각뿐이라고 믿는 사람, 문제의 원인은 늘 타인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말이지요. 어떤 사태에 대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절대 명제를 들이대는 사람, 그리고 결코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물론 타인의 삶도 그렇게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힘을 빼야 합니다.

이 마음에서 힘빼기를 철학자들, 특히 현상학자들은 에포케(epoche, 판단 중지 혹은 판단 보류)라고 불렀습니다. ‘판단하는 사람에 따라 그 입장, 상태, 조건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어떠한 것에도 가장 좋다거나 나쁘다는, 또는 옳다거나 그르다는 판단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무엇에 대해서든 판단을 유보하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판단을 중지 혹은 유보했을 때 타인을 제대로 보고 세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는 달리 얼굴에 칠규가 없는 타인, 즉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내 기준에 따라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혼돈의 사유는 최고의 유연성이자 위대한 에포케입니다. [淸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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