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유림, 추계석전대제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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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유림, 추계석전대제 봉행
  • 포천일보
  • 승인 2015.10.2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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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포천유림 30여명은 전통의상을 갖춰 입고 청성사와 채산사에서 2015년 추계석전대제를 봉행했다. 포천향교 이종훈 전교을 비롯한 양윤택 포천문화원장 등 포천유림들은 유교전통에 따라 예를 갖춰 추계대제를 진행했다.

제례가 끝난 후 이종훈 전교는 “이달에 포천유림과 함께 면암 최익현 선생 묘소를 방문했는데 너무 초라한 모습을 봤다”면서 “면암 선생은 고향 포천으로 모셔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면암 선생 묘소 포천이전 운동에 문화원장 등 전 유림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의견을 모의자”고 했다.

◇채산사
최익현(1833∼1906)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최익현 선생은 구한말의 애국지사로 호는 면암이다. 철종 6년(1855)에 과거에 합격한 후 장령, 동부승지, 공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고종 10년(1873)에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광무 9년(1905)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대마도로 유배되어 단식을 하다 숨을 거두었다.

지역 유림들이 사당을 지었으나 1927년 일본인이 폐쇄한 것을 1947년 다시 지었고 1975년에는 보수가 있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인 맞배지붕이다. 사당 중앙에는 선생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시고 있고 왼쪽에는 독립운동가인 최면식(1891∼1941)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청성사
청성사는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선생을 제향한 사당이다. 최치원은 12세 때인 신라 경문왕 9년(869)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 선주 표수현에서 고을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리인 현위(縣尉)를 거쳐 관리들의 감찰을 담당하는 시어사(侍御史) 등을 역임하였다. 879년에 황소의 난(黃巢亂)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붓으로 적을 물리칠 정도로 명문장가였다.

통일신라 88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여 당과의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정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894년(진성여왕 8) 나라를 개혁하기 위한 『시무10조(時務十條)』를 올려 아찬(阿飡) 의 관직에 올랐으나 중앙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은둔하며 여생을 마쳤다.

최치원은 주옥같은 문장을 많이 남겨 동방 문장의 창시자라 불렸으며, 유교의 성인들을 모신 문묘에 배향되었다. 청성사는 정면3칸 측면1칸 반의 평면규모로 지붕이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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