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의 길이 되다”…광암 이벽 학문을 종교로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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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길이 되다”…광암 이벽 학문을 종교로 승화
  • 포천일보
  • 승인 2023.09.0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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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에서 태어나 포천에서 순교하고
포천에 잠든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최대 80만 참가 천주교 세계청년대회 2027년 서울 개최
같은 해 교황청 광암 이벽 복자(성인 반열) 승인 예상
세계 천주교인 광암 이벽의 도시 포천 집중 조명할 듯
광암 이벽 기념관 전경
광암 이벽 기념관 전경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성경 문구가 신앙인이 아닌 기자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광암 이벽 선생은 포천에서 태어났고, 포천에서 순교한 후에도 포천에 묻혔다. 그는 천주학(서학)을 학문으로 접하고, 종교로 승화시켜 한국 최초 천주교의 길을 연 선각자다. 이런 연유에서 이벽 선생의 초상화가 김대건 신부 초상화와 함께 한국 천주교의 성지 명동성당에 걸려 있다.

기자는 지난달 23일 포천시가 조성한 광암 이벽 기념관을 찾았다. 김승한 천주교 춘천교구 포천교회(성가정 성당) 성지 해설사가 현장 취재에 동행했다. 기념관에는 선생의 삶과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광암 이벽 초상화
광암 이벽 초상화

선생은 1754년 포천 화현면 화현3리에서 태어났다. 기념관 인근이고, 사후에 선생이 묻힌 곳도 이 부근이다. 조선 영조 30년 출생한 선생은 남인 가문의 무인 집안 6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그의 집안이 비록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남인 가문이었다지만 천주학을 종교로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선생의 형과 동생이 무과에 급제해 황해병마절도사와 좌포장이라는 장군이었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달랐다. 키가 8척에 이르는 건장한 체구를 가진 선생이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오직 세상 이치의 연구로 천주학을 접했고, 이후 서구 세계 탐구에 빠져들었다.

선생이 15세가 되던 1769년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에서 스승 권칠신이 주최한 강학회에서 서학을 처음 접했다. 이후 권칠신을 중심으로 정약전과 정약용, 이승훈, 이총억 등 20대 초반의 남인 계열 학자들과 함께 서양선교사가 엮은 서적 연구에 심취했다. 그때 있었던 일을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기록했다. “눈 오는 밤에 이벽이 찾아오자 밤새워 불을 밝히고 경전을 토론했는데, 그로부터 7년 뒤에 서교(西敎)에 대한 비방이 생겼으니,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학은 학문에서 종교로 승화되었다.” 이는 이벽 선생이 학문을 넘어 종교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사실상 한국 천주교가 잉태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승한 성지 해설사
김승한 성지 해설사

 

천주학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이벽 선생은 거처를 한양 수표교로 옮긴다. 1783년 이승훈이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와 함께 청나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서양선교사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도 받아오라고 하는 당부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구입해 올 것을 부탁했다. 이승훈은 북경에 머물고 있던 그라몽 신부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이때 이승훈이 천교실의, 기하원본 등 천주교 서적과 망원경 등을 전하자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천주교 교리연구와 묵상에 몰두했다.

이듬해인 1784년 한양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교황청이 임명한 신부가 아닌 이승훈에게 요한 세례자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런 연유에서 한국 천주교가 1784년을 천주교 창립으로 정했다.

복음전파에 나선 선생은 최창현, 최인걸, 김범우 등의 중인계급과 정약종‧약전 형제와 그의 스승 권칠신‧일신 형제 등 양반계층에게도 천주교를 전파한다. 당시 중인 계층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김범우가 이벽 선생의 복음전파를 위해 교회당을 지으니, 이곳이 현재의 명동성당 위치였다고 동행한 김승한 해설사가 알려줬다. 이벽 선생이 한국 천주교를 창설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이벽이 수령이 되어 천주교회를 전파하였다’고 순조실록에 기록했다.

하지만 1785년 봄(정조 9년) 을사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한다. 정기적으로 집회를 이어오던 이승훈, 김범우, 이승훈, 정약전, 권일신 부자 등 10여 명이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다가 체포되었다가 김범우만 투옥하고 나머지는 석방됐다.

이후 선생은 부친 이부만의 부름을 받고 포천 집으로 내려왔다. 유림의 온갖 비방을 부친의 배교로 슬기롭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천주교를 버리지 못하고 단식 아사 순교의 길을 택했으니, 선생의 나이 31세였다. 천주학을 종교로 승화시킨 한국 최초의 신앙인이자 천주교의 길을 연 선생이 순교한 것이다.

광암 이벽 묘지
광암 이벽 묘지
광암 이벽 재현 기념관

 

선생의 묘는 지난 1979년 화현면 화현 3리에서 발견되어 그해 6월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 이전 미사를 마치고 수원교구 천진암 성지에 초기 천주교를 창립한 벗들과 함께 잠들었다. 화현에는 선생의 육신과 숭고한 정신이 깃든 진토묘가 있다.

포천시는 광암 이벽 기념 전시관, 광암 이벽 재현관, 기념성당 등을 짓고 지난 5월 20일 개관식을 가졌다.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지난 8월 첫 번째 성지담당 신부가 임명되어 9월부터는 매일 미사를 연다.

한국 천주교는 로마 교황청에 이벽 선생을 복자 신청했지만 선생의 죽음이 순교냐를 두고 이견을 보여 승인이 미루어져 왔다. 최근에 다시 신청했고, 교황청이 공적심사 중이다. 한국 천주교는 2027년 승인받을 것으로 믿는다는 김승한 해설사의 전언이다.

3년마다 열리는 천주교 세계청년대회가 2027년 서울에서 열린다. 이 행사에는 전 세계에서 가톨릭 청년 50-80만 명이 참여하고, 교황도 직접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같은 해 교황청이 이벽 선생의 복자 신청을 승인할 것으로 보인다. 2027년 세계 천주교인들은 포천시를 집중적으로 조명할 것이다. 포천시는 그에 맞는 대비책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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