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서예가 장포 박재교 선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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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서예가 장포 박재교 선생을 만나다
  • 포천일보
  • 승인 2015.03.0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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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는 마음을 닦는 일이고 붓을 드는 것은 자기수양일 뿐”

"장포 선생의 작품세계는 황희 청념결백, 안중근 애국, 안창호 교육정신이 어우러진 곳"

장포 박재교 선생을 만나기 위해 포천시 신읍동 무호당을 찾았다. 무호당은 장포 박 선생이 작품 활동을 하는 공간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묵향이 진하게 풍겨온다. 묵향을 길게 음미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장포 선생이 반긴다. 예술가답다는 표현이 옳을 만큼 수더분한 작업복과 모자, 그리고 작업공간인 서실이 잘 어울린 듯싶다.

반갑다고 짧게 인사를 나누고 서실에 전시된 작품과 붓, 전각 등에 대해 설명을 부탁했다. 그러자 장포 선생은 친절하게 기자가 질문하는 대로 자세하게 설명한다. 장포 선생은 올해 나이 57세다. 요즘 사람들은 시간이 너무 없다고 한다. 그 원인을 장포 선생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 한다. 과거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면 항상 시간이 넉넉해진다”고 한다.

▲ 장포 선생이 그동안 작업을 해 왔다는 붓이다. 서생의 서실에는 수십종류의 붓이 비치되어 있다.
▲ 선생이 그동안 작업해 왔다는 전각작품들이다.

장포선생 예술의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묻자, 선생다운 대답이 온다. 그는 “옛날 선비들은 기본으로 서예를 했다. 예전에는 서예가 예술이 아닌 선비들의 일상 생활이었다. 나중에 미술의 한 분야로 편입되었을 뿐 서예는 마음을 닦는 일이고 붓을 드는 것은 자기수양”이라고 했다. 장포선생은 존경하는 사람 3명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선 청백리의 대명사인 황희 정승이요. 두 번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애국을 실천한 안중근 선생이다. 또 교육정신을 실천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혹시 청념결백과 애국, 실천교육이 장포 선생의 예술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서예에 매료되어 무작정 귀향길에 올라

선생이 육군대학 지휘부 총장 부속실에서 군복무를 하던 시절, 총장이 붓을 들고 서예를 하던 모습이 너무 멋이 있어 보였다. 이때부터 서예에 매료되었고, 군복무 시절 아무도 몰래 붓글씨 연습을 했다. 그리고 전역한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독학으로 서예에 빠져들었다. 이 당시 가로 선긋기만 6개월 동안 혼자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궁핍한 생활로 강의는 물론 교본도 구입할 수 없었다. 그저 틈틈이 서점에 들러 서예 이론서를 눈동냥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인지 서예에 대한 선생의 애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이제는 서예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가족과 친지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포천에다 서실을 차리고 아예 귀향을 해 버렸다. 그 당시 포천하면 유림의 영향력이 대단한 지역으로 초보 서예를 하는 사람이 정착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곳이었다. 또 서실하면 어린 학생들에게 한자나 붓글씨를 교습하는 곳인데, 유림과 지역민으로부터 인정받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장포 선생에게는 또 하나의 고난의 시기였다. 그래서 선생은 고향인 창수면 오가리로 가서 500명에게 가훈을 써주기로 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 겨울 집집마다 방문해 무료로 가훈을 써주겠다고 했다. 눈보라를 맞으며 온 선생을 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 하러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질타하면서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해 겨울 창수면 전 지역을 찾아 다니며 가훈 써주기를 했지만, 목표인 500가정에 훨씬 못 미쳤다. 그래도 우연히 관내 학교와 연락이 되어 학생들에게 가훈 써주기로 목표를 달성했다.

형식에 얶매이지 않은 장포만의 작품세계 만들어

장포 선생은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출신이다. 그래서 그는 오가리의 명산인 보장산에서 ‘장’와 포천의 ‘포’를 합해 ‘장포’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 장포 선생은 여유롭게 조용해 보이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 그러면서도 정해 놓은 틀에 얶매이지 않는 예술가다운 분위기를 풍긴다. 뭔가 선생만이 추구하는 작품 세계가 독창적이고 비범한 듯한 예술가의 혼이 느껴진다. 서예를 바탕으로 한 장포 선생의 전각기법은 전통 기법을 찾아 이룬 독특한 민체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 선생은 우리고유의 천자문이 있다고 한다. 우리 천자문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중국 천자문이 활개를 치고 있어 그에 대한 반성을 한다는 의미에서 석고대죄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을 설명하면서 삿갓을 씌고 있다.
▲ 그동안 선생이 작품에 사용해 온 붓들이다. 선생은 수십종류나 되는 붓으로 작업을 해 왔고, 일부만 보관하고 있다.

선생은 대한민국 현대인물사에 수록되어 있고, 포천시의회보 제호 및 천주교 포천성당지 가브리엘 제호를 서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장포 선생은 2014년 신년에 청와대로부터 연하장을 받았다. 이 연하장 내용과 그림은 선생이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사 내용을 전각기법으로 만들어 청와대에 보낸 작품이었다고 한다.

▲ 선생이 작업을 할 때 그림과 부인 홍명진 여사와 함께 그린 초상화
▲ 선생은 작품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저술을 해 왔다. 선생이 그동안 저술해 온 서적들이다.
▲ 올 연초 청와대가 선정한 연하장 내용이다. 선생이 2014년 박근혜 대통령 신년사를 보고 작품을 만들어 청와대에 보냈다. 그리고 청와대에서 연하장으로 만들어 올 초 보냈다고 한다.

장포 선생은 포천시민대종에 새겨진 명문을 비롯해 포천탄생 600주년 기념탑 휘호,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 방문 기념탑 글씨, 광릉시험림 90주년 기념탑 등 포천 곳곳에 크나큰 흔적을 남겼다.

孝가 근본인 교육사상과 가정생활

장포 선생이 가장 근본으로 여기는 것은 孝라고 한다. 그리고 선생은 학생들에게 사자소학을 권하는데, 사자소학 내용의 90%은 효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이 귀향했을 때 서실을 열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이 당시 선생의 수강생들은 수강신청을 새벽부터 줄 서야만 했다. 효를 기본으로 하는 한자 공부와 원칙을 고수하는 선생의 교육을 학부모들이 전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서양화가인 부인 홍명진 여사와 두 명의 자녀가 있다. 선생은 두 자녀가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학원을 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훌륭한 인격체를 갖춘 성인으로 성장해 주었다. 큰 아이는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이고, 둘째는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선생이 집에 들어가면 자녀들이 아직도 큰 절을 한다고 한다. 효를 근본으로 한 교육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70세에 대동천자문 대작만드는 게 소망

60세에 가까운 장포 선생은 70세에 이루고자 하는 대작이 있다. 이미 몇 년전에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고유의 대동천자문을 1000m 길이의 화선지에 쓰는 일이다. 그리고 포천석 낱개에 새기는 작업을 하는 일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중국 천자문과 다른 우리민속 고유의 대동천자문을 돌에 새겨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한다. 민족고유의 천자문을 후세에게 자랑스럽게 전달해 주고 싶다는 게 선생의 마음이다. 아울러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 홍명진 여사와 부부작품전을 갖고 싶은 게 선생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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