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탄생 500년 양사언 선생 발자취를 찾아서
상태바
[역사기행]탄생 500년 양사언 선생 발자취를 찾아서
  • 포천일보
  • 승인 2016.06.08 15: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전기 4대 서예가인 양사언 선생은 포천 틀못이 출신 수많은 작품남겨
▲ 양윤택 문화원장이 봉래 양사언 선생과 금수정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로 시작되는 시조를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봉래 양사언 선생이 우리지역 출신이라는 점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얼마전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 봉래 선생이 포천 신북면 기지리 출신이고 내년이 선생 탄생 500주년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또 양윤택 포천문화원장께서 봉래 선생의 직계 후손이다. 내년이 봉래 선생 탄생 500주년이 되는데, 이렇다할만한 기념사업이 계획된 게 없어 양윤택 문화원장께서 안타까워 한다는 말을 듣고 포천문화원을 찾았다.

양윤택 문화원장은 봉래 선생이 조상이기에 기념사업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췄다. 하지만 포천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탄생 500주년 기념식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었다. 그러면서 봉래 선생이 전국 각지에 남긴 흔적을 모아 책자로 발간했으면 한다는 뜻도 함께 전했다.

▲ ‘태산이 높다하되’로 시작하는 시비는 최종규 전 문화원장이 추진위원장을 맡고 작고하신 김진동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봉래 선생 시조 건립추진위원회가 세워졌다면서 양윤택 문화원장이 고맙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태산이 높다하되’로 시작되는 시조가 봉래 양사언 선생의 작품을 한번쯤은 누구나 읆조려 보았을 것이다. 문화원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봉래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더해 졌다. 더욱이 봉래 선생과 연관된 유적이 포천지역에 있다하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도 싶었다. 그래서 금수정과 길명사를 답사하겠다고 하니 문화원장께서 동행해 주겠다고 했다.

지난 4일 오후에 문화원장과 함께 금수정을 향해 떠났다. 그곳을 향해 가는 동안 문화원장께서는 봉래 선생이 1517년 중종 12년에 태어나 1584년까지 생존했던 인물로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틀못이 출신임을 알려준다.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이다. 선생은 초년에는 주로 포천 지역에서 시조와 거문고를 벗 삼아 안빈낙도를 즐겼다. 중년에는 강릉과 고성, 회양, 철원 수령으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면서도 산수자연을 좋아해 도가적 흥취에 심취했다. 말년에는 안변부사로 있으면서 도가적 흥취에 더욱 몰입되었다. 금강산을 흠모하여 자신의 호를 봉래라고 칭하게 된다. 유학자이면서도 도가사상에 심취하여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한다.

▲ 금수정은 소의 머리 형국이라고 해서 우두정이라고 했다가 양사언 선생이 금수정으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주위에는 창옥병과 준암, 연화암, 동천석문 등 절경지가 많아 옛날 시인과 묵객들이 이 정자를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 명필인 양사언 선생을 비롯해 사암 박순, 한음 이덕형, 석봉 한호, 강산 이서구 등 조선시대 명류들과 얽힌 일화와 유적이 남아 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창수면 오가리에 위치한 금수정에 도착했다. 안동김씨 고가터가 위치해 있다. 금수정은 영평천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절벽위에 위치하여 예부터 영평 8경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소의 머리 형국이라고 해서 우두정이라고 했다가 양사언 선생이 금수정으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주위에는 창옥병과 준암, 연화암, 동천석문 등 절경지가 많아 옛날 시인과 묵객들이 이 정자를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 명필인 양사언 선생을 비롯해 사암 박순, 한음 이덕형, 석봉 한호, 강산 이서구 등 조선시대 명류들과 얽힌 일화와 유적이 남겨져있다. 지금도 암벽에 새겨진 금수정이라는 봉래 선생의 글씨와 10m 바위돌에 새겨진 취대라는 글씨, 그리고 냇가 한복판 바위에 경도라고 새겨진 각자 등은 옛 자취의 일부다. 봉래 선생의 편액이 달려 있던 본래 금수정은 6.25때 소실되었고, 기단과 장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1989년 당시 포천군과 지역유지들이 뜻을 모아 5.2평 규모의 현 건축물을 복원했다.

금수정과 함께 ‘태산이 높다하되’로 시작되는 거대한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시비는 최종규 전 문화원장이 추진위원장을 맡고 작고하신 김진동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봉래 선생 시조 건립추진위원회가 세워졌다면서 양윤택 문화원장이 고맙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봉래 선생의 생애와 금수정에 얽힌 사연을 들으면서 길명사로 향했다.
길명사는 1988년 최종규 전 문화원장이 포천유림의 뜻을 모아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도비와 시비와 포천유림 그리고 봉래 선생 후손들이 모금하여 1991년 준공했다. 추진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최종규 전 문화원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양윤택 문화원장의 설명이다. 이곳 길명사에서는 매년 음력 9월16일 포천유림 행사로 봉래 선생 제향을 올리고 있다.

봉래 선생과 연관된 2곳을 답사하고 나니 해가 저물었다. 돌아오는 길에 역사유적과 문화상품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 생각을 해 본다.

문화콘텐츠가 상품이 되면서 전국 지자체에서는 그 고장출신 역사적 인물을 브랜드화 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심지어는 다른 지역출신 인물을 내세워 기념관이나 역사관을 짓기도 한다.

역사적 인물을 조명하고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그 지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또 외부에서 찾는 이들에게는 역사적 체험이라는 교육과 함께 관광객을 유치하는 효과를 거둔다.

훌륭한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고장으로 치자면 다른 지역보다 포천출신이 훨씬 많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몸을 초개처럼 버려가면서 항일운동을 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포천시와 지역사회에서는 이렇다할만하게 조명되고 있지 않아 안타깝다. ‘현재는 과거의 모습이고 미래는 현재의 모습’이라는 한 미래학자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