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사는 세상 - 정미숙 해뜨는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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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사는 세상 - 정미숙 해뜨는 집 원장
  • 포천일보
  • 승인 2017.01.2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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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 장애1급 남편과 결혼…“장애아동과 생활이 정말 행복”

“좌절하기를 수십번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3-4일간 이불을 뒤집어쓰고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중증 장애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주인공은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 위치한 해뜨는 집 원장 정미숙씨.

정미숙 원장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해뜨는 집에는 지체장애인 29명과 종사자 10명, 그리고 정 원장 가족이 오순도순 생활하고 있다. 지금은 다소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 원장이 살아 온 길은 험난하고 고달픈 여정이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는 물음에 정 원장은 “젊어지는 게 싫다.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 젊어지는 것이 싫다”고 말한다. 지난 시절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정 원장이 장애인 시설에 종사하게 된 사연은 대학 3학년 때 뇌병변 장애1급인 남편을 만나면서 부터다. 이때 그는 한국성서대학 성서학과에 재학중이었다. 충실한 크리스찬이었던 정 원장은 가정생활이 어려워 대학을 곧바로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해 고교 졸업 후 2년만에 다시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비록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면서도 시간을 쪼개가며 빈민촌을 찾아 학습지도와 미용봉사를 나가곤 했다.

그러던 중 대학 3학년 때 서울 중계동에서 열린 장애인 행사장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 여러명의 장애인들이 모였는데, 유독 한 사람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다름아닌 지금의 남편 박진수씨다. 드라마 연속극에서나 나올 법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박진수씨는 뇌병변 장애1급으로 혼자서 거동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일반인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 원장에게는 달랐다. 두 사람은 모든 대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함께 자원봉사를 하던 친구들은 “진짜 알아듣느냐 아니면 알아듣는 척 하냐”며 비아냥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봉사활동이 끝나갈 쯤 남편이 말을 걸어왔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정 원장은 언니와 했던 약속을 잊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 원장은 결혼생각은 전혀 없었다. 독신으로 살면서 외딴 섬이나 시골지역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싶었다. 그런데 행사장에서 만난 남편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은 남과 다르게 밝다”고 생각했다. 장애인들은 표정이 어둡고 사람과 담을 쌓고 산다. 그런데 정 원장만 만나면 금방 친해졌다. 남편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건 신앙적인 힘이 컸다.

정 원장은 “사랑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힘든 시간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결혼하게 된 사연을 들려 주었다. 뇌병변 장애1급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딸 말에 엄마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혼을 반대하던 엄마의 통곡은 3-4일간 지속되었다. 그때까지 단 한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던 딸이 장애인과 결혼하겠다니 엄마의 상실감은 이루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온 가족이 나서서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93년 결혼한 두 사람은 남편이 기거하던 오두막집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겨울이면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그야말로 허름한 집이었다. 이 집에는 두 사람만 생활하는 게 아니라 다른 장애인과 함께해야 했다. 아주 작고 낡은 장애인 시설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가난한 게 감사했다고 한다. 남편이 부자이고 잘 살았다면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악착같은 정 원장의 삶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막상 결혼을 했지만 생활을 꾸려간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함께 사는 장애인을 돌보고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마치지 못한 대학까지 다녀야 했다. 그러나 남편이 시작했던 장애인 시설을 다시 건축하겠다는 꿈을 갖게 된다. 집에만 갇혀 있는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꿈일 뿐 현실은 너무 멀어 보였다. 땅을 구입할 땅은 물론이거니와 건축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장애인 제과제빵 일을 돕기도 하고 교회 전도사로 생활하던 중 신북면 모델하우스가 비어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해뜨는 집이라는 중증 장애인시설을 만든다. 이때 중증 장애인 9명과 함께 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큰 딸과 아들, 그리고 막대 딸이 차례로 태어났다. 장애인과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쉬는 날이 없이 활동해야 했다. 장애인을 돌보고 아트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자녀들을 돌볼 시간조차 없었다.

“기저귀 차고 빨래를 건조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고 느끼면서도 장애인시설 운영과 사회복지 관련 대학원 학업을 그만 둘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6살이었던 큰 딸에게 밥하는 법과 반찬 놓는 법을 알려줬다. 한번은 학교에 가고 있는데, 큰 딸이 울면서 전화했다고 한다. 이유는 “엄마가 없는 사이에 삼촌이 왔는데, 삼촌이 밥을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남동생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대학원 졸업식에서 큰 딸이 했던 “엄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찡하다고 말했다. 사실 자녀들을 양육한 게 아니라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엄마를 위해 온갖 일을 해 왔다는 것이다.

현재의 해뜨는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한다. 2006년경 장애인 시설에 참외를 제공하겠다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참외밭으로 갔다. 그런데 “그 참외밭을 보는 순간 이곳이다”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그 때 밭 주인이 토지를 매매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토지 1000평에 평당 20만원이라는 말을 듣고, 주인을 설득해 16만원까지 매매가격을 낮췄다. 그렇다고 토지를 구입할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마치 ‘MBC 칭찬합시다’에 출연해 받았던 3천만원이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이 돈으로 일단은 계약을 해 버렸다. 그러나 나머지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장애인 제빵 돌봄 봉사를 하면서 알게 됐던 장애인이 사망하기 이전 평생 모은 1천만원을 정 원장에게 남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1천만원은 어렵게 장애인 시설을 운영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선뜻 시사했다는 것이다. 토지매매 계약금을 치르고 잔금은 대출금으로 충당했다.

기적은 해뜨는 집 건축과정에서도 나왔다. 소요 건축비는 총 8억9천만원이다. 로또기금에서 2억원을 지원받았다. 장애인 시설 사연을 알고 있던 서울의 한 목사님의 도움이 컸다. 어느 날 후원자인 익명의 사업가가 2천만원을 시사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지인과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건축비를 마련하게 됐다. 정 원장의 사회복지사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개인시설이나 법인시설이나 장애인을 돕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원금은 법인시설에만 있을 뿐 개인시설은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이런 차별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경기도청에 개인시설 지원을 하지 않는 이유를 항의했다. 개인시설 단체가 없는 가운데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달 동안 경기도에 산재한 장애인 개인시설을 찾아다니며 책자를 만들어 제출하고 장애인개인시설 경기도협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경기도의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이었던 이강림 의원의 도움을 받아 개인시설에 대한 예산지원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이어 보건복지부의 예산지원을 받기 위해 전국협회를 구성했다. 경기도협회 구성후 일주일만의 일이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획재정부가 예산을 삭감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시 수십명의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큰 변화가 없어 법인 예치금을 낮춰 줄 것을 요청했고, 7억원이었던 법인 예치금을 2억원까지 낮췄다. 3년만의 일이었다. 수없이 좌절하면서도 포기하기 않았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3-4일간 이불을 뒤집어쓰고 대성통곡한 게 한 두번이 아니다.

정 원장은 “함께 생활하는 장애인들이 엄마라고 불러줄 때 이 아이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면서도 “이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일반인 보다 작은 것에도 행복해 하는 장애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면서 이제는 조금 여유로워 보인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정 원장의 3명의 자녀는 훌륭하게 성장해 주었다. 뇌병변 장애인인 아빠와 밖의 일에 매달리는 엄마, 그리고 장애인과 함께 하는 생활공간은 사춘기 아이들에게 삐뚤어질 염려가 있었다. 상담자로서 엄마와 장애인시설 운영자로서 엄마 덕택에 아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성격좋은 아이들로 성장했다. 기적을 매번 경험하면서 산다는 정 원장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함께 살겠다고 생각하니 나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 같다”면서 “그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할 뿐”이라고 말한다. 비록 살아온 과정이 너무 힘들었지만, 행복한 시간들이었다고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며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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