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전 의원 기고] 이한동회고록 ‘정치는 중업이다’를 읽고
상태바
[박종희 전 의원 기고] 이한동회고록 ‘정치는 중업이다’를 읽고
  • 박종희 제16.18대 국회의원
  • 승인 2019.01.01 14: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박종희 제16.18대 국회의원

최근 출간된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 ‘정치는 중업(重業)이다’를 읽으면서 정치는 과연 어떤 사람이 해야하는가하는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이 책에는 포천출신 정치거목의 발자취와 함께 그가 펴고자했던 대한민국의 미래청사진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전총리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과 함께 5,6공 문민정부 김대중(DJ)정부의 고비마다 그가 맡은 중요한 역할, 포천사랑과 정치철학이 아주 재미있고 솔직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는 판검사등 법조계 17년을 마치고 정치에 입문, 3명의 대통령으로부터 여당사무총장 3선 원내총무 정책위의장 등 당 3역과 내무부장관 국회부의장에 이어 정권이 바뀐 DJ시절 국무총리(2년2개월)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정치모범생’.

포천군내면 명산리 산골에서 태어나 고학을 하다시피 서울대법대를 졸업하고 법조인의 길을 걷다가 정치에 입문, 6선동안 영호남 등 지역기반 없이 정치를 해 온 그가 ‘느닷없이’ 2002년 대통령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연유도 무척 궁금했었다.

그와 나는 동아일보기자와 여당원내총무로 처음 만나 16대 국회에서 초선국회의원과 총리로 의정생활을 함께 한 인연이 있다. 40초반인 나를 포천후배라고 어느 자리에서건 추켜 세워주셨고 정치인의 덕목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 고마운 분이다. 대통령을 시험과 국민평가단 다면면접으로 뽑는다면 그는 단연 수석으로 합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경륜 스케일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의 기억력과 기록의 습관 자기관리는 참으로 놀랍다.

한글을 하루에 다 깨우친 그의 천재성과 독서습관은 DJ가 “책을 언제 그렇게 읽어서 모든 일에 박식하신가”고 여러 번 격찬했다고 한다.

군부독재가 극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국회법개정안을 대통령 면전에서 반대했던 일, 1988년 100여건의 비민주적 법률을 개정하고 내무부장관시절 전국 곳곳의 노사분규를 강경진압하고 전대협 임종석의장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던 일은 원칙주의자의 일단을 보여준다.

5공청산 당시 김윤환총무-이종찬총장라인도 두 손 들고 나갔던 전두환국회증언 정호용의원직 사퇴 등을 이끌어낸 일, 김영삼(YS)대통령시절 세 번째 원내총무에 임명돼 하나회해체 공직자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예결특위상설화 인사청문회도입 공정거래위독립 등을 특유의 친화력으로 매끄럽게 해냈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 ‘이한동총무학’은 대화와 타협을 존중하지만 원칙없는 타협은 없다고 칭찬했다.

일부에서 그가 5,6공 군부정치에 부역했다고 비난하는데 그가 6.29선언과 헌법개정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희생을 막는데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을 알면 그런 지적을 거둬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총리시절엔 보수진영에서 의심하는 DJ정권 대북정책의 균형추역할을 하며 안보불안감을 불식시켰고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국격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정치인 자서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솔직한 사죄와 반성도 아끼지 않았다.

84년 유성환의원 체포동의안 처리에 대해 “인간적으로 못할 짓”. 예산안의 변칙처리에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 DJ정부시절 DJP연합이 깨지면서 자민련 출신이 모두 철수할 때 JP총재의 뜻에 반해 총리직을 유지했던 일에 대해 “인간사의 신의를 중하게 여기고 살아온 사람으로 과오....다시 한 번 용서를 빈다”고 술회했다.

그의 정치적 겨울은 3당합당후 YS민주계의 집요한 러브콜을 거부하고 민정계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시작된다. 97년3월 YS로부터 당대표로 낙점됐다가 언론에 보도되는 바람에 이회창으로 당대표가 바뀌었다는 비화도 털어놓았다.

그가 그때 당대표가 됐다면 대한민국 역사와 우리 포천의 미래도 크게 달라졌을 게 분명한데....너무도 안타까웠다.

그가 스스로 진단한 대통령이 못된 이유.

“나의 정치행보는 옳고 바르지만 너무 밋밋하고 감동이 없어 대중적인 인기를 전혀 끌지 못했고 요직을 맡아 무슨 일이건 제대로 잘 하는 사람정도로 국민들의 머릿속에 엷게 각인되 있을뿐..” “2001년 10월 JP의 복귀명령을 어기고 DJ의 뜻에 따라 총리직에 유임한 것은 경위야 어떻든 내가 JP를 배신한 것으로 국민이 본다”“16대 대선에서의 나의 행보는 나 스스로에 대한 무지와 무모한 의지가 빚어낸 한 토막 희극에 불과하다”고 씁쓸하게 회고했다.

그러나 이전총리의 지론인 역동정치론 국민통합론 국가전략론 중부권역할론 등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가 가장 모범적이고 현실적인 ‘대통령학’을 완성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와 IT NT 등 신산업에 대한 혜안은 DJ도 감탄할 정도였고 그때에 깔아놓은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산업의 인프라가 지금의 국부를 이룩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다. 총리로서 그가 천명한 국가비전에 대한 경륜은 원대하면서도 현실적이다.

패권주의와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비전도 단호하면서 설득력 있다.

그는 역사바로세우기가 역사지우기가 되면 안 되며 국민통합의 요체는 국민에게 공정한 정부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데 있다고 현정부에게 충고했다. 대통령은 헌법적 가치를 지키는 헌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데 말 한마디에 원전건설이 중단되고 국무회의를 무시하는 청와대 비서실 중심의 국정운영, 구속위주의 검찰권행사 등도 헌법을 무시하는 또 다른 적폐라고 우려했다.

보수진영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건국이념과 정치체계의 뿌리와 기둥이 바로 보수주의라는 자부심을 갖고, 홍익인간정신에 기초한 뚜렷한 철학을 토대로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젊은 피를 수혈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라고 제언했다.

그는 중앙무대에서 큰 정치를 하면서도 포천발전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당사무총장시절 43번국도를 확장하기위해 대통령을 설득해 국방부예산을 끌어온 것을 필두로 대진대 경복대 중문의대를 유치하면서 교육문화도시의 기틀을 마련한 것, 스키 골프 온천 등 레저 스포츠산업을 유치한 것, 포천의 상수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이 전총리가 그때 다져놓은 인프라를 후배정치인들이 더욱 발전시켰다면 지금 포천에는 전철을 유치하는데 예비타당성조사를 하느니 마느니하는 수치스런 모습은 아닐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정치에 투신하면서 포천 고향흙에 보답하겠다며 덕필유린(德必有隣:덕은 반드시 이웃이 있다) 해불양수(海不讓水:바닷물은 무슨 물인지 따지지 않고 받는다)를 금언으로 삼아온 노정객의 경륜과 우국충정이 회고록에 절절히 흘러 넘쳐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