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그래도 유자식 상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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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그래도 유자식 상팔자
  • 포천일보
  • 승인 2019.04.2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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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수필가 김병연

제 밥그릇은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 예전 예닐곱씩 낳던 자식을 보며 했던 말이다. 아마 아이를 제한 없이 낳던 시절, 그러잖아도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할 수 있었던 자구적인 위로였을 것이다. 흔히 자식은 부부의 가교라고 한다.

남남끼리 만나서 서로 마음 맞춰 살아야 하는 부부 생활은 여러모로 녹록치가 않다. 50~60년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일어나는 우여곡절들, 하지만 쉽게 결혼을 깨트릴 수 없는 이유가 자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을 키우고 또 그들이 어른이 돼 독립할 때까지 부모로서 도리와 의무, 그렇기에 개인의 감정에 치우칠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부부 사이에 낳은 자식 때문이라는 것에 우리 부모 세대는 물론 지금도 많은 부부들이 공감할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자식을 거의 예닐곱 명, 많게는 열 명 넘게까지도 낳았다. 많은 자식이 곧 재산이었던 시절이었다. 키우는 것에 그다지 막막함도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 밥그릇은 챙겨 나왔으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지난 70~80년대엔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과잉 우려로 정부에서 산아제한을 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는 어찌 보면 혁신이었다. 부부간의 일에 나라가 개입한 거의 첫 번째 정책이었을 것이다. 국민들은 정부 시책을 어기면 큰일 나는 것처럼 너나 나나 두 명에 그쳤다.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은 한국인은 아들딸 가려 낳지 못함에 아쉬움이 컸지만 울며 겨자 먹을 수밖에 없었다. 두 명 이상 낳는 사람은 조금 과장해서 미개인 취급을 받기까지 했으니 눈치도 보였을 것이다.

젊은 부부에게 자녀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50% 정도만 필요하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가족의 개념이 희박해져 가고 있는 현실에서 굳이 자식을 낳아 불확실한 미래에 희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또한 낳더라도 한 명이다 보니 자식은 신줏단지가 됐다. 그들에게 제 밥그릇은 제가 챙겨 나온다는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는 웃자고 하는 얘깃거리도 안 된다.

정성껏 돌보고 특별한 교육을 시켜서 아이의 빛나는 인생을 만드는 것은 부부에게 숙제이고 드러나는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자식에게 들이는 정성도 정성이지만 대한민국 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의 반증과도 무관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고 거기에 아이 양육문제는 비단 한 가정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인 고민거리로 부상했다. 아이 한 명 키우는 데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는 구체적인 금액도 계산되고 있다. 물론 자식들의 부모부양도 옛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결국 자신의 인생은 철저하게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대부분의 부모에게 삶의 이유이자 의미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겐 별 설득력 없는 얘기일지 모른다. 오늘만 있고 내일은 없는 듯이 사는 세대인데 자식은 자신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가장 확실한 두려움의 존재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자식은 키우는 데 공도 들지만 자식은 때론 삶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자식으로 인해 기쁘기도 하지만 어쩌다 자식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겪는 고통은 무엇보다 크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는 것이리라. 그래서 오히려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상팔자라고 했을 것이다. 드디어 무자식이 상팔자인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자식이 매개가 돼 더욱 끈끈했던 가족은 그 자식을 선택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쉽게 해체되기도 하니 인류사의 불행한 역습이다.

정말 무자식이 상팔자일까.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한 일 중 가장 뿌듯한 일이 사랑하는 아들딸을 낳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존재로 키웠다는 것이다. 삶이 힘들지만, 그래도 유자식 상팔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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