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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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을까?
  • 김현철 포천노곡초등학교장
  • 승인 2015.01.20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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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성찰을 위한 인문학 공부의 필요성에 대하여-
▲ 김현철 노곡초등학교 교장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눈[가치관]으로 세상을 봅니다. 모두가 세상을 보는 자신의 눈이 정확하다고 믿습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이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시민의 대표를 뽑는 선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장 좋은 대표자를 선출한다”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좋은 대표자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늘 서로 의견이 맞지 않습니다. 그 누구보다 내 판단이 가장 정확하다고 믿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지성의 부족함은 스스로 인정한다. 그러나 판단력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한 데카르트의 말은 우리가 사고(思考)하는 방식의 맹점(盲點)을 잘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세상을 보는 폭과 깊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현상(現像)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개인의 판단력에 의한 주시(注視)와 관조(觀照)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 하나를 살펴봄에 있어서도 그 일을 이루는 요소간의 관계와 복합적인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행간(行間)의 의미를 읽어내고 현상의 이면(裏面)에 흐르는 근본적인 구조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힘이 바로 인문학적 소양입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자신의 좁은 시야(視野)에 의존하기 때문에 지엽적(枝葉的)인 분석의 과잉(過剩)과 더불어 통찰(洞察)의 결핍(缺乏)이 일어납니다. 나무 앞에 바짝 서서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면서도 숲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런 협애(狹隘)한 시각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을 왜곡시키고 나아가 타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답은 인문학에 있습니다. 즉 인간의 삶을 문장(文章)과 역사(歷史)와 철학(哲學)에 비추어 볼 줄 모르면 진정한 통찰(洞察)과 이해에 이를 수 없습니다.

“문장은 기교의 산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고 영혼이다. 역사는 포폄(褒貶)이다. 역사라는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반성하고 나아갈 바를 살피는 것이다. 철학은 단지 관념의 퇴적이나 사념의 유희가 아니라, 깊은 생각과 넓은 조망을 통해 삶의 진정한 원리를 발견해가는 살아있는 운동이다.”(정진홍,『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에서)

인문학은 이처럼 수 천 년 인간 역사에서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 얻어진 통찰의 교과서입니다. 인생이라는 난제(難題)의 모범답안인 셈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어 온 뛰어난 인물들이 인문학에 몰두하는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뛰어난 인물만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인류가 이룩한 모든 지혜를 자기 것으로 삼아온 것이지요. 반면 역량이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세상을 보는 눈과 판단의 근거로 자신의 경험만을 맹신(盲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장자(莊子)』「추수(秋水)」편에서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잘 꼬집고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井蛙]에게 바다를 말해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공간’에 갖혀 있기 때문이요, 매미[夏蟲]에게 얼음을 말해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고집하기 때문이며,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편협한 사람[曲士]에게 바른 길을 말해줄 수 없는 것은 자신만의 ‘지식(경험)’에 갖혀 있기 때문이다.(井蛙不可以語海者, 拘於虛也. 夏蟲不可以語氷者, 篤於時也. 曲士不可以語道者, 束於敎也.)”

그렇습니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라는 시간과 비교할 때 찰나에 불과한 나의 시간과 모든 인간의 삶이 펼쳐진 드넓은 공간과 비교하면 먼지와도 같은 나의 공간 속에서 얻어진 나의 보잘 것 없는 지식과 경험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깊어지면 모르는 게 많아지고 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구조주의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의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성의 객관성을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폭력적이다.”

편협한 사고(思考)의 틀에 갇힌 사람일수록 그 피해가 자신에게 그치지 않습니다. 내 가치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사고(思考)의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책은 한 권도 안 읽고 공부는 안 해도, 풍부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믿는 그런 사람 말이지요. 이런 사람이 사회와 조직에서 갖는 권한이 많아질수록 사고의 폭력은 더 과격해지고 그 피해는 더 치명적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세상을 좁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좁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때문에 공부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야말로 공부가 필요하다는 반증(反證)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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